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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이야기 속 데이터

[김택우의 <이야기 속 데이타>]_#09. ‘옥포해전’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 이순신은 화포의 사거리에서 답을 찾았다..

by 데이터스토리 2017.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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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옥포해전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 이순신은 화포의 사거리에서 답을 찾았다..

“장군, 신호가 올라왔습니다.” 녹도만호 정운 무겁고 낮게 보고를 했다.
“좋다. 이제 왜적을 소탕할 때가 되었구나,” 장군의 눈은 저멀리 날아오른 신기전을 바라보았다.
“제군들, 들어라! ‘이제부터는 경거 망동하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이순신은 무겁고 짧게 군령을 내렸다. 새벽.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이끌고 옥포만으로 향했다.
“장군, 포구에 정박중인 왜선이 보입니다. 명을 내려 주소서” 그날 12시, 왜선이 보이자 조선수군의 긴장감은 팽팽하게 달아올랐다. 참모들은 이순신의 명을 받기 위해 그의 주위로 모였다.
“기다려라. 우리에게는 포가 있다. 적은 조총으로 덤빌 것이다. 걱정 마라. 사거리가 다르다.” 이순신은 포구 안쪽에 있는 지휘선으로 눈길을 돌렸다. 왜군 지휘관인 ‘도도 다카도라’는 동서로 포위망을 형성하며 내륙으로 다가오는 조선해군을 보고는 급히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장군, 저들이 배를 돌려 공격합니다. 조총을 저리 쏘아 대고 있습니다.” 참모는 걱정이 되었다. 일본배는 날렵하여 판옥선 보다 속도가 빨랐고, 저들의 조종 소리에 기가 질리고 있었다.
“이운용. 나가 선봉에 선다. 모든 화포로 왜선을 공격해라.. 적에게는 포가 없다. 조총만이 있을 뿐이다. 그 조총은 사거리가 짧다. 하지만 우리 총통은 거리가 3배이상 멀다. 걱정말고 화포로 승부를 걸어라.” 이순신은 확신에 찬 어조로 이운용에게 선봉장임무를 맡겼다.
이운용은 함선을 이끌고 앞으로 나갔다. 조총을 쏘며 왜선을 다가왔지만 조총은 소리만 날 뿐 탄환은 날아오지도 않았다.
“천자총통을 쏴라. 우현 비격진임천뢰를 넣고 쏴라, 좌현 차대전을 장착하고 쏴라. 이번에는 대장군전을 넣어라. 쏴라.” 화포장은 떨리는 손으로 심지에 불을 붙였다. ‘꽝’하는 소리와 함께 3미터 길이의 대장군전이 하늘로 솟구쳤다. 1000보를 날아가는 대장군전은 일분 군선을 강타하며 커다란 구멍을 내버렸다. 수류탄과 비슷한 ‘비격진천뢰’는 적선 가까이 터지며 적을 아비규환으로 몰고 갔다.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에 일본군은 혼란에 휩싸였다. 연이어 날아드는 포탄은 배에 타고 있는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연전연승에 취해있던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전 함대는 왜선을 향하여 포를 쏴라.” 여기 저기 노잡이는 배의 속도를 유지하느라 바쁘고, 화포장은 총통에 화약을 재느라 바삐 움직였다. 옥포 앞바다에 어느덧 부셔진 왜선과 적군의 시체로 넘실대고 있었다. 정박된 왜선 50척 중 26척은 완전 격침했다. 일부 배는 전투의 와중에 지휘관을 태워 몰래 빠져나갔고, 배로 빠져나가지 못한 왜군은 육지로 피해 달아났다. 조선 육군의 매일되는 패배의 소식에 단비와 같은 승리였다. 조선 해군은 하늘 높이 만세를 부르며 물러나는 적을 보며 서로 얼싸 안았다.
이순진 장군은 승리의 기쁨에 들뜬 병사를 보며, 참모는 아군은 부상자 한명이 있을 뿐 피해는 없다는 전과를 보고해왔다. 숙영지로 돌아가는 배에서 참모는 궁금증이 생겼다.
“장군님, 적에게 다가가지 않고 포로 제압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음. 그건 말이야, 무기가 갖고 있는 장점과 적의 취약점을 수집해서 분석해 보았기 때문이지. 적의 배는 기동을 높이기 위해서 가볍게 만들어져 있거든. 적이 가지고 있는 소총도 100보 정도의 거리 밖에 못간다네. 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총통에 무엇을 장착하느냐에 따라 달리 쓸 수가 있지. 보았겠지만 길고 무거운 창살 같은 대장군전은 1000보를 날아가네. 그 무게와 속도로 적의 함선을 뚫어 버리는 거지. 구멍 뚫린 배는 점점 가라 앉아 버리거든. 거기다가 우리는 적의 혼란 스런 상황에 근접전을 하면서 화살을 퍼부었네. 화살은 150보를 가거든. 결국 우리는 이겨 놓은 전투를 확인 하로 온 것이네.” 장군은 참모의 질문에 대답을 해 주면서, 눈길은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병사들에게 가 있었다.
"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야. 적들의 끝은 더 참혹할 것이네. 시작은 그들이 했을지 몰라고 끝나는 것은 내가 결정할 거야."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내 놓은 장군은 묵묵히 노를 젓고 있는 격군이 있는 아래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인 ‘옥포해전’. 이순신 장군의 말대로 이 해전은 승리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20여일이 진 후의 출전이었다. 그 동안 이순신은 진영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준비가 되었을 때 출전한 것이다. 적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고 아군의 단점을 최소하는 한편 장점을 더욱 높이는 시간이었다.
장군의 무기와 상황에 대한 준비와 자료의 수집이 있었기에 23전 23승의 대기록으로 전쟁의 아픔을 겪는 백성에게 기쁨을 안겨준 것이다.
수집된 데이터를 보면, 천자총통에 사거리와 적군의 주무기인 소총의 사거리에 대한 정보가 근접전 보다는 먼 거리에서의 공격을 전략으로 잡게 했다. 왜군 군선인 ‘세키부네’는 속도를 높이기 위해 얇은 재질로 만들어 졌다는 정보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반면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강한 소나무 재질로 탄탄하게 건조되어 있었다.
옥포해전을 마친 그날 저녁, 쉬는 병사를 독려해 웅진 합포의 적선 5척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는 판옥선의 튼튼함을 무기로 왜선을 들이받아 부셔버리는 작전을 펼쳤다. 이순신장군은 아군은 무기, 배, 그리고 적군에 대한 데이터 수집과 분석을 통해 항상 이길 수 있는 준비를 갖춘 것이다. 이기는 자는 무엇인가가 다르다. 그 다름의 중심에는 데이터 수집 및 분석이 항상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옥포해전에서 왜군의 지휘관으로 참전한 ‘도도 다카도라’는 이순신과의 악연이 깊다. 같은 해 사천해전,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과 1597년 7월에 치러진 칠전량해전, 같은 해 9월 16일에 치룬 유명한 명량대첩에도 참전하였으며, 7월 19일의 절이도해전까지 6번의 이순신과의 전투에서 고배를 마신 악연을 안고 일본으로 넘어 갔다. 75세까지 장수를 누리며 일본 에도 시대의 중신으로 권력의 곁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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