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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이야기 속 데이터

[김택우의 <이야기 속 데이타>]_#07 -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준비된 데이터에 있었다.

by 데이터스토리 2016.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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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준비된 데이터에 있었다.


“딩동”

“누구슈” 백발의 노인이 문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튜리뷴지 기자 샬콤, 맥두웰 샬콤 기자입니다. 맥아더 장군이시죠.” 기자는 살짝 웃으며 노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노인은 맥아더 장군으로 75세가 되었다. 한국전쟁 한 창 발발 중인 1951년 4월 갑자기 퇴직 명령을 받은 후 은퇴를 하게 되었다. 노인은 한 손을 내밀어 기자와 악수를 했다. 기자의 미소는 훨씬 편안해 졌다. 아마 거절의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갑네. 그래, 어쩐 일로 나를 찾아왔나?” 맥아더는 평온한 일상이 좋았지만 그 따분함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마침 이 친구가 찾아와 주니 너무나 고마웠다. 하지만 전쟁의 노장답게 겉으로는 태연하게 보이도록 했다.

“저희 신문사에 이번 년 말 기획 특집으로 장군님이 수행하신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특집기사를 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장군님께 당시 상황과 숨겨진 일화 등에 대해서 듣고자 찾아왔습니다. 괜찮으시면 설명 부탁 드리겠습니다.” 기자는 찾아온 목적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하고는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음. 그 얘기 말인가~! 긴 얘기가 되겠는데, 잠시 여기 앉게나. 참, 커피 마실 텐가 아니면 홍차를?” 맥아더는 문 앞에 놓여진 의자를 가리키며 얘기를 했다.

“커피 한잔 하겠습니다.” 기자는 자리에 앉으며 노인에게 얘기했다. 노인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기자는 의자에 앉아 밖의 정경을 보며 맥아더를 기다렸다.

“여깄네. 설탕도 같이 가지고 왔으니 필요하면 넣게.” 맥아더는 기자가 앉아 있는 옆 의자에 앉았다. 가지고 온 홍차 한 모금을 마시고 잠시 회상에 잠기며 말을 시작했다.

“벌써 많이 흘렀지.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느닷없이 새벽에 남한을 침공했지.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었지. 그 때 연합사의 요청으로 수원 근처로 날아가서 전쟁의 진행상황을 직접 보았네. 서울에서의 포격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피난민의 행렬은 끝이 없었지. 북한군의 그 기세대로라면 한 달 안에 남한은 먹히겠더구먼.

그래서는 안되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지 이제 5년된 나라이지 않은가. 전세를 꺾을 방법이 없을까 고민을 하였지. 지도를 보고 있자니 한반도 땅의 허리부분이 잘록하더군. 모양이 반도 안의 반도 모양이었지. 굴곡이 많이 져 있어서 접근이 제한적 이겠더군. 후후.

그 쪽으로 공격해서 들어오는 적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지형이었지. ‘바로 여기야!’ 적의 허점을 치고 들어갈 수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인천’이더군” 맥아더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 올랐다. 컵을 입으로 가지고 가서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문제가 있었지. 상륙작전을 감행할 그 곳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 없더군. 당시 클라크 대위와 한국인 2명을 인천 근처의 영흥도에 잠입을 시켰지. 그들을 통해서 많은 데이터를 수집했지. 방어를 위한 진지, 방파제, 부두의 위치와 형태, 근처 해안의 유속과 수심, 물이 빠진 후의 갯벌의 단단함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등대가 상하지 않고 온전히 있다는 것도 알았지.

연합군에서는 인민군 병력까지 추정해 주더군. 인천에 1천명, 서울에 5천명, 김포에 5백명으로 파악했다더군. 사실 그랬지. 북한국은 당시 낙동강에 집중한 것이지. 거기만 뚫리면 한반도를 다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총력을 기울였던 거야.”

“그런데 장군님. 북한이 그렇게 어수룩하게 준비했을까요?” 기자는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 맞네. 그들도 연합군의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지. 그래서 우리는 첩보를 흘렸어. 주문지, 군산, 인천 이 3곳중 한 곳에서 상륙작전이 있을 거라고 내용이었지. 누군가 그러더군, 인천으로 상륙 하면 확률은 5천분의 1이라고.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인천바다의 조수간만의 차였어. 세계에서 2번째로 심한 곳이었지. 상륙작전을 수행할 날짜를 잡아야 했지. 조수간만의 차를 고려하였더니 3개가 나오더군. 그 중 가장 가까운 9월 15일을 D-Day로 잡았지. 시간은 06시 30분을 상륙시간으로 정했는데, 오후 1시에는 간조가 되어 물이 완전히 빠지고, 2시부터 다시 물이 들어와서 저녁 7시쯤 물이 꽉 차는 만조가 되더군. 우리는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대를 기준으로 작전을 수립했지.

함정이 모이는 시간과 1차 상륙정이 출발하는 시간과 인천 해안으로 접근하는 시간까지 같이 준비를 했지. 그 작업을 위해 참모 진들이 고생이 많았지. 그 많은 장비와 인원에 대한 데이터, 날씨까지 고려하며 편성한 것이야.”

“작전 당일 군사들을 월미도에 상륙 시키고 얼마 후 그곳을 점령했다는 무전을 받았지. 아침 8시쯤일 꺼야. 마음이 풀리더구먼. 성공이라는 확신이 든 거야.  월미도 옆에 있는 소월미도를 이어서 점령 했지. 오후 2시 물이 밀려오는 시간에 준비한 수백 대의 상륙용 차량과 장갑차를 인천해안에 상륙 했지. 다음날 인천을 탈환하고 부평, 김포를 거쳐 영등포까지 가서 드디어 한강에 다다른 거야. 병사들에게 한강을 건너기 위한 도하작전을 준비 시켰지.” 맥아더는 흐려지는 눈을 뜨며 당시의 생각을 하는 지 말을 멈추었다.

“맥아더 장군님. 장군님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은 어떻게 해서 가지셨나요?” 기자는 이번 특별 기사를 준비하면서 많은 자료를 살펴보았었다. 거기에는 당시 대통령인 트루먼 및 연합사에서도 반대한 그 작전을 끝까지 밀어붙여 성공한 것이다. 어떤 믿음이 있었길래 모두가 반대하는 것을 시도한 것인지 그 의지가 궁금했다.

“……” 

맥아더는 탁자에 놓여진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떨어지는 해를 향해 담배연기를 길게 내 뱉으며 기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단지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사람들 기억 속으로 사라진 맥아더장군. 6·25 전쟁이 발발하고 2개월 반이 지나서 전개된 인천상륙작전은 그의 결단과 실행력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한국전쟁에 15개국에서 지상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 작전에는 미군을 중심으로 한 251개의 함정과 수 십대의 수송선이 참여를 하였다. 해변에 도착한 연합군은 당일 월미도를 점령하고 이어서 인천을 수복한 후, 9월 28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기세를 몰아 북한 깊숙이 치고 들어갔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밀려 다음해 1월 4일 서울에서 다시 철수하였고, 3월 15일 한국군 제1사단을 중심으로 재탈환 하기에 이르렀다. 1953년 7월 27일, ‘한국휴전협정’에 싸인을 하면서 3년간의 전쟁은 중단 되었다. 협정조인식에 북측은 북한과 중국이 남측은 연합군 대표인 미국이 참여하였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휴전에 대한 찬성하지 않은 관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참전한 연합군의 사망자는 200만명에 달했으며, 사망한 한국인은 북한의 113만명을 합쳐 250만명이나 되었다. 20만명의 전쟁미망인, 10만명 이상의 전쟁고아 그리고 1000만명의 이산가족을 만들었고, 산업 및 공공시설의 80%, 정부건물의 4분의 3,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었다. 전쟁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민은 전쟁 회복과 재건 그리고 가족을 위해 멀리 중동의 건설현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독일의 탄광과 간호사로 나갔고, 월남전에 참전했다. 국민의 피와 땀을 통해 재건된 대한민국은 또 다시 국민의 열정과 참여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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