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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이야기 속 데이터

[이야기가 있는 데이터] #01 - 다산정약용의 정리방법

by 데이터스토리 2016.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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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데이터] #01 - 다산정약용의 정리방법

"이 놈, 어디서 거짓을 고하느냐?" 곡산부사의 호통이 경내를 쩌렁쩌렁 울렸다.

"아닙니다요. 거짓이 아닙니다요. 김이득은 논이 10마지기 입니다요. 그래서 군포를 더 거두어야 합니다요." 아전은 고개를 치켜 들고는 부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엄하다. 어디서 거짓을 아뢰느냐? 여봐라 침기부 가지고 오너라" 옆에 있던 아전은 급히 서류를 들고 왔다.

"네가 거짓을 아뢰. 봐라, 여기 김이득은 양민이다. 현재 농사를 짓고 있다. 논은 5마지기에 소가 2마리다. 어디서 논이 10마지기라고 거짓을 말하더냐?”

부사의 호통을 들은 아전은 놀라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이곳 곡산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아는 것인지 놀라웠다.

"아이고, 죄송합니다요. 소인이 잘 못 알았습니다요.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아전은 손을 싹싹 빌었다.

곡산부사는 내친 김에 다른 죄도 물었다.

"이 봐라. 너는 김이득의 옆 집에 사는 백성 아무개에게 군포를 걷으려고 했겠다. 그 백성 아무개는 20리 떨어진 고을에서 이주 해 왔다. 홀아비이고 다리를 저는데, 어떻게 군포를 내겠느냐?"

아전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는 지 귀신인가 싶었다. 이제는 손이 떨리고 입이 떨려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아전들은 오금이 저렸다. 빨리 그 자리가 끝나기 만을 바랬다.

위 이야기는 정조의 명을 받은 다산 정약용선생이 황해도 곡산에 목민관으로 내려갔을 당시의 내용입니다.

당시 다산 정약용은 아전들의 횡포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 횡포를 막기 위해 백성들의 논, 밭, 소, 홀아비인지 과부인지 등을 집집마다 상황을 파악하여 상세히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을 <침기부(砧基簿) 종횡표(縱橫表)>라고 불려지는 문서(데이터 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표를 기준으로 수탈을 행하는 아전을 혼을 내 준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어느 한 사람도 불평을 하는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조선후기에는 양민만이 군역을 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양반은 '면제' 였다고 해요. 문제는 군역이 지역별로 할당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관에서는 그 할당을 채우기 위해 백성을 못살게 군 것이죠. 이를 못 견딘 백성들은 도망을 가버리거나 아전에게 뇌물을 주어 가구수를 조작했다고 합니다.

관은 큰일입니다. 할당량을 채워야 하거든요. 결국 아랫사람을 못살게 군 것이죠.

"야! 무조건 채워놔. 그것도 못해. 이틀 시간 준다." 많이 듣는 얘기죠.

 

아전은 호구조사 할 때 가구당 인구수나 재산상태를 조작하여 할당을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뇌물을 받고 숫자를 조정하기도 한 것이죠. 그러니 숫자가 제대로 맞을 리가 없었죠. 백성은 줄고 군역 할당량은 채워야 하고, 그래서 온갖 비법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비법이라기에 민망한 횡포를 보면,

이미 사망한 군역 대상자는 그 몫을 가족에게서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16세 미만의 어린아이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군포 부담자가 도망하면 친척에게서 군포를 징수하는 족징(族徵),

이웃에 연대책임을 지워 군포를 징수하는 인징(隣徵)등 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부사시절 이를 막 위해서는 실정을 정확히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차트 모양의 종횡표를 만들어 가구별 내용을 정확히 조사 기록해 둔 것입니다. (아래 그림)





요즘은 엑셀을 이용해서 이런 표를 많이 만들어 두죠. 과거에도 이렇게 데이터 관리를 했습니다. 우리만 똑똑한 것은 아니죠. <침기부 종횡표>를 보시면 곡산의 가구 현황을 한 눈에 알 수 있겠죠. 이런 데이터의 준비를 통해서 아전들의 부정에 대해서 혼을 내니 점차 그 고을은 군역에 있어서는 불만이 점점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겠죠.



살기 어려웠던 시절, 이런 관리의 등장은 백성에게는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다산정약용 선생의 이런 정리 방법은, 18년간의 강진 유배시절 <목민심서>,<흠흠심서>등 500권에 달하는 문집을 남기는 기틀이 되었습니다.

요즘도 많이 어려운 시절 입니다. 그래도 군데 군데 훌륭한 지자체장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니 다행입니다. 김영란법이 란파라치를 위한 제도가 아닌 나라의 도덕적 기틀을 잘 다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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